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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기/본것

[멜로웹툰/레진] 람작 작가의 가능성이 보인 <갈매기와 밀렵꾼>

*주의 : 이 웹툰은 19금으로, 직접적인 성묘사/데이트 폭력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유명 여배우 임해도의 아들 태영은
어머니와 그 애인 영화감독 최정우 앞에서 자신의 첫 단편영화를 상영한다.
그러나 최정우의 눈에 들어온 건 단편영화 속 여배우, 바로 태영의 여자친구인 아미였다.
호숫가 옆 저택에서 시작된 하나의 뒤틀림이 훗날 불러올 파장은...?! 


작가 : 람작 / 플랫폼 : 레진
연재기간 : 2018년 (완결/16화)
키워드 19금, 퇴폐, 무너진 가족, 새드엔딩
등장인물 :
태영 - 잘나가는 배우 어머니 말곤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영화감독 지망생.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준 아미에 집착하며, 최정우를 마음 깊은 곳에서 멸시하고 동시에 경계한다. 영화감독 지망생.
아미 - 태영의 여자친구. 가정폭력 가해자인 새엄마와 방임자인 아버지 사이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최정우의 팬이었으며, 그를 삶의 구원자로 여기게 된다.
임해도 - 최고의 여배우이자, 태영의 어머니, 최정우의 연인. 자신 밖에 모르는 나르시스트처럼 보이나, 연인의 외도에도 아무 말 못하는 외로운 여자.
최정우 - 인기 감독.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언제나 자신감에 가득 차 보이지만, 강간, 액션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영화감독이란 평을 내심 신경쓰는 듯 보인다.

'안톤 체홉'의 희곡 <갈매기>가 원작인데, 자칫 잘못하면 통속 막장극일 수도 있는 스토리를 굉장히 섬세하고 여운 있게 그려냈다. 원작이야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작품이고. 하지만 <갈매기와 밀렵꾼>이 갖는 감성의 깊이는 순수하게 원작을 해석한 람작 작가의 역량이라 생각한다. 사실 람작 작가에게 이 정도 감성이 있을 거라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작가의 전작은 레진 인기작인 <속죄캠프>로, 개인적으론 도저히 이해갈 수 없는 스토리 때문에 중도하차해야 했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갈매기와 밀렵꾼>은 달랐다.

태영은 그림자다. 빛나는 여배우이자 지독한 나르시스트인 엄마 밑에서 철저히 외면 받는 존재로, 해도는 야박하다 할 정도로 태영의 모든 것을 업신여긴다. 그런 태영의 유일한 빛은 그의 여자친구인 아미. 사랑스럽고 다정한 성격의 아미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재수생 태영을 인간 태영으로 존중해준다. 태영은 아미를 주인공으로 하여 첫 단편영화를 촬영한 뒤, 그 영화를 집에 초대된 사람들에게 소개한다. 그 자리엔 해도의 애인인, 최정우도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해도는 태영의 작품을 철저히 비웃는다. 정우는 그런 해도를 말리며 태영을 위로하는 듯하지만, 정우 역시 영화에 출연한 아미에게 관심이 있었을 뿐 해도 따위엔 관심이 없다. 멸시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때문인지, 다른 수컷의 관심을 경계하는 남자의 감인지 날카로워진 태영은 아미에게 더더욱 집착하기 시작한다. 결국 태영은 가정폭력 희생자였던 아미에게, 데이트 폭력이라는 또다른 폭력을 행사한다.

아미에게 접근하는 어른, 정우. 폭력을 행한 뒤 사과 대신 가슴을 주무르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태영과 달리, 정우는
아미를 단번에 메이저 여배우 자리로 올릴 수 있는 어른이었다. 서울로 올라간 정우를 쫓아, 아미는 그대로 집을 나와 버린다. 그리고 속옷차림으로 정우의 집으로 찾아가 결국 태영을 버리고 그와 하룻밤, 아니 예상컨대 꽤나 긴 기간동안 새컨드로 그와 함께했을 것이다.


<갈매기와 밀렵꾼>에서 가장 매력적인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이다. 순수한 동시에 주늑 들어 보였던 아미는 인기 감독인 정우에게 캐스팅되자 학대 가해자였던 가족을 비웃으며 닳고 닳은 어른의 미소를 짓는다. 정우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두고도) 어린 여자에게 빠진 하지만 진심인 것만 같은 로맨티스트로 보이지만, 결국엔 한때의 유흥이었을 뿐임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듯 보였던 해도는 자신의 두 남자가 어린 여자에게 빠진 상황에 대해 거칠게 항의할 법도 하건만, 헤어질 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저 외로운 여자에 불과했다.

변하지 않는 이는 오로지 태영 뿐이었다. 아미를 순수하게 사랑한 태영은, 아미가 사라지자 그야말로 무너져버렸고, 동시에 아미를 되찾기 위해 증오하던 엄마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인기 영화 감독이란 꿈을 이룬 후, 제일 먼저 아미를 찾는 태영. 하지만 다시 만난 아미는 아비 없는 아이를 키우고 있었고, 그에 무너져 태영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해석의 차이가 있겠지만, 난 태영이 자살한 이유가 단순히 아미가 정우의 아이를 낳은 것 때문만은 생각한다. 태영은 아미 집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고, 아이에게 과거 아미와 데이트할 때 받았던 추억의 스티커를 선물한다. 아마 태영은 아이를 보는 순간, 자신을 유혹하여 섹스를 하고 다음 만날 날에 대해서도 말 끝을 흐리던 아미를 떠올렸을 것 같다. 마치 수 많은 남자들을 집으로 끌여들이며 아들이었던 자신은 그림자 취급했던 자신의 엄마 '해도'처럼. 1화에서 태영x아미보다도, 엄마에게 무시당하는 태영이 먼저 나오는 게 조금 의아했었는데, 왠지 마지막 엔딩을 위한 인트로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때문에 원작을 따라간다면 갈매기는 아미여야 할테지만, 웹툰에서의 갈매기는 태영이라고 생각한다. 갈매기를 의미하는 대표대사가 아예 삭제된 점은 차치하더라도, 웹툰 스토리 안에서 아미는 태영을 흔드는 뮤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발 디딜 곳 없이 계속 방황해야 했던 이는 태영 뿐이었고, 변색된 사랑으로 태영을 추락시킨 아미는 오히려 밀렵꾼에 더 가깝다.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생각할 점이 많았던, 멜로 드라마. 오랜만에 스토리적으로 농염하고도 어른스러운 성인웹툰을 만났다.